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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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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공부/『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장회익/ 2012.05.20]

 

 

나는 너요, 곧 우리다

 

겸손

 

들어가며

작년에 장회익 선생님을 뵈러 갔었다.

나이가 70을 넘으셨으나, 젊은이들과 소통하려 하고,

또한 온생명을 이해시키고자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온생명을 이해한다면,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듯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궁금해졌다.

생명이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온생명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온생명이란?

온생명이란 쉽게 요약하면 ‘지구상에 나타나고 있는 생명현상들이

그 특성을 유지해나가면서 존속해나갈 최소의 여건을 구비한 전체 체계’라 할 수 있다.

각각의 낱생명들이 유지될 수 있는 전체적 질서와 체계인 것이다.

이러한 온생명 안에서 낱생명들의 생존이 유지되고,

온생명 또한 내적 구성요소들 사이의 정교한 조화에 의해 그 기능이 유지된다.

 

여기서 장회익의 독특함은 생명을 각각 개체단위로서 발견하려 한 것이 아니라,

개체가 주변여건과 어떠한 관련을 맺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비로서 생명현상이 이해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김겸손’이라는 생명현상이 외부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를 파악하다보니,

공기와 관계있고, 물과 관계있고, 햇빛도 관계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생각을 확장시키다보니 온생명이라는 물질적 체계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김겸손’이란 생명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 전체적인 체계를 고려해야 각각의 개체들이 이해될 수 있다.

 

‘김겸손’이란 생명와 환경이란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생명’ 이라는 것 자체가 이 모든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온생명이다.

 

 

‘나’라는 의식의 발생과 확장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를 갖는 온생명 안에서 개체가 생성되고,

그 과정들이 거듭 반복되어왔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러한 과정 가운데 ‘나’ 라고 하는 ‘의식’이란 것이 발생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낱생명들의 탄생은 여러 물리적 진화과정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의식의 탄생은 물리학의 틀 안에서 해명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렇게 신비한 개체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형성된 ‘나’라는 의식이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확장의 첫 단계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곧 함께 살아가는 공동주체인 ‘우리’라는 개념이다. 우리의 삶은 결코 하나의 낱생명인 돈독 개체로 분리되어 이루어지지 못한다. 같은 목표를 지향하여 협동해 살아가는 다수 개인의 집단이 많은 경우 의미있는 삶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렇게 될 경우 ‘나’의 범위를 넓혀 자신을 포함한 이 전체집단을 새로운 하나이 삶의 주체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인식된 새로운 주체가 바로 ‘좀 더 큰 나’인 ‘우리’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확장은 비단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로서 ‘우리’에 그칠 필요가 없다. 내 몸이 ‘나’의 범위에 들어오는 이유가 내 삶을 영위해나감에 있어서 이것이 꼭 필요하며 또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 삶을 영위해나감에 있어 꼭 필요하며 또 보살핌을 받아야 할 다른 모든 것을 더 큰 의미의 ‘나’안에 포함시키는 것 또한 당연하다. (p.26)

 

‘김겸손’이라는 생명이 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그 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몸이 ‘김겸손’의 범위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을 확장시키면, 결국 ‘김겸손’이라는 생명이

그 삶을 영위하도록 영향을 주는 모든 것 또한 ‘김겸손’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는 ‘우리’라는 공동주체로서의 ‘김겸손’이 생겨나게 되고,

이것을 더 확장시키면 “김겸손(가장 작은 나)=온생명(가장 큰 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풀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개체로서의 ‘김겸손’과 공동주체로서의 ‘김겸손’이 충돌하는 것이다.

공동주체 내부에는 개체로서의 ‘김겸손’에는 속하지 않으면서,

공동주체로서의 ‘김겸손’에는 속하는 ‘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갈등은 모두가 공동주체로서의 ‘나’ 의식이 강할수록 줄어들 수 있다.

 

결국 ‘우리’안에서 발생되는 어려움들은

이러한 갈등을 얼마나 잘 조정하는지에 달려 있다.

구성원들이 개체로서의 ‘나’와 공동주체로서의 ‘나’사이의 간극을 줄여서,

개체로서의 ‘나’가 원하는 삶이 공동주체로서의 ‘나’가 원하는 삶과

일치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우리의 상황은?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공동주체의식은 어떠한 상황인가?

 

이러한 상황 아래 오로지 제도의 틀만을 간직하고 있는 공동체에 속하게 된 개인들이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짙은 공동주체 의식을 뿜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이 영위하게 되는 공동체 생활이란 개체로서의 '나'를 넘어서 공동주체로서의 '나'로 승화되는 과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자기 몫을 더욱 철저히 지켜내야 하는 '작은 나'의 강화과정에 가깝다. 33p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없는 문구다.

우리의 공동체 생활이 공동주체로서의 ‘나’로 승화되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몫을 지키고자 하는 ‘작은 나’의 강화과정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얼마 전 우리 공동체에서는 갈수록

더욱 개인화되어가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고민했었다.

책에 의하면 이러한 우리의 상황은

‘나’가 곧 ‘우리’라는 공동주체적 의식이 부족하거나 부재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개체 간의 협동을 통한 상위 개체의 출현이고,

이를 주체적으로 영위하게 될 새로운 ‘나’는 삶의 한 단계 진전된 형태이다(p.33).

 

우리는 이런 협동을 통한 상위 개체의 출현을 경험하고 있고,

그것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고자 모여 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노력이기 보다는,

우리가 공동주체라는 것, 내가 곧 공동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노력으로 우리는 2주 정도의 시간 동안 서로에게 안부를 묻기도 하고,

서로에게 소소한 선물을 증여하기도 하고, 얼굴을 좀 더 보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노력을 온생명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상대방에게 어떤 좋은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있었다고 하기 보다는

이러한 행동을 통해 서로가 공동주체임을 자각하고, 느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모여있는 것이 단순히 ‘작은 나’를 강화시키는 과정에 가깝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공동체라 하기 어렵다.

 

 

온생명 안에서 새삶공동체가 갖는 의미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공동체 운동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을 답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위상에 대해 책에서 언급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제 이러한 상황을 온생명의 입장에서 해석해본다면, 인간의 이러한 통합적 문명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40억 년 만에 처음으로 온생명 자체가 하나의 통합적 의식을 지닌 지적 존재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실로 하나의 우주사적 의의를 지닌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경우 인간의 문명이 온생명의 두뇌이며, 이것의 정신적 측면인 인간의 통합적 문화가 곧 온생명의 정신이 되고, 그 안에 나타나는 인간의 집합적 의식이 다름 아닌 온생명의 자기의식이 된다. 즉, 온생명은 바로 우리 인간을 통해 하나의 의식주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p.88)

 

온생명은 40억 년 만에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가진 지적 존재를 태어나게 하였고, 이것은 다시 말해 온생명은 우리 인간을 통해

하나의 의식주체로 거듭나게 되었음을 뜻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문명이 온생명의 두뇌가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 때문에 온생명은 굉장한 댓가를 치뤘다.

인간으로 인해 이 지구의 평화와 생태계가 파괴되었음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의식을 갖게 된 인간 때문에 온생명은 많은 변화와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것을 책에서는 암세포에 비유했다.

자신의 역할을 망가한 세포들이 무분별한 증식에 의해 암을 만들어가듯,

인간이 자신의 역할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증식만을 꾀할 때

우리는 온생명의 암세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려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 또한 인간과 동역하기 위하여 많은 댓가를 치뤘고, 고통을 겪으셨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깨닫고 행하기 전까지

이러한 댓가는 계속될 것이다.

 

즉, 우리 세계 안에서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내 몸의 한 부분과 다른 한 부분 사이의 부조화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질병에 해당하는 것이며, 평화의 회복이라는 것은 이 질병에 대한 치유작업에 해당하는 일이 된다. (p65)

 

우리 공동체의 존재가 갖는 의미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온생명의 의식주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우리는 암세포가 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곧 온생명임을 깨닫고, 무분별한 증식이 아닌,

온생명 안에 있는 부조화에 대항하고 치유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형성해 가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온생명의 공동주체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이거나,

반대로 암세포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각각의 구성원이 이 공동체의 공동주체임을 깨닫고,

그리고 이 공동체가 온생명의 핵심적인 의식을 감당하고 있음을 깨달아,

그 역할을 잘 감당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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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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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공부/『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고미숙/ 2012.02.29]

 

 

사랑! 연민과 환상을 넘어서

 

겸손

 

혼자인 것은 즐거워~?

난 어릴 때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없었다.

마치 예수님처럼 흠모할 것이 전혀 없는 외모에.

평소에는 얘가 살았나 죽었나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쑥스러움을 잘 타 여자애들한테는 장난은커녕 말도 한 번 제대로 못 걸었으니,

나에게 눈길 한 번 주는 아이 없었다.

 

나중에 나이가 좀 들어가면서는 달라지긴 했으나,

어릴 때 형성된 스스로에 대한 인식은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것 같다.

이제는 여자아이들한테 말도 잘 걸고, 관계도 잘 맺어갔지만,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지는 못했었다.

 

그러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사실은 고백하기 가 어려워, 사랑을 시작하면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용기내지 못한 것인데 말이다.

“우린 아직 어려”, “난 아직 연애를 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어”,

“지금 이건 그저 가벼운 감정일 뿐이야”라고 규정하며,

스스로를 매우 신중한 사람인 것처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러한 고민 없이 가볍게 연애를 시작하는 것 같은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냉소를 보내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정작 속으로는 외로워 미치겠으면 서 말이다!

그러면서 꿈꿨다. 내가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면

그 때 사랑하리라!

그 때에는 그동안 다른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아껴놨던 사랑을

모두 쏟아 부어 주리라! 라고.

그리고 결국 그렇게 20년이 넘도록 살아버렸다.

 

 

대상의 발견이 아닌, 대상의 창조

 고미숙씨는 이 책을 통해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사랑은 대상을 창조하는 능력이라 말하고 있다.

우주의 흐름을 따라 같은 공간과 시간대에 어떤 강한 촉발이 일어나게 되는

시절인연을 잘 타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이러한 시절인연이 몇 번 스쳤던 것 같다.

상대가 그리 특별한 것 같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들뜨고,

한 순간에 모든 오감이 발달하며,

내 몸의 기운이 재배치되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몸의 변화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 안의 두려움 또한 작동하게 된다.

고백했으나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연애를 시작한 후 얼마 안 되어 헤어지면 어떡하나,

내가 지금은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연애를 시작하면

그 마음이 거짓이면 어떡하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의 때가 연애를 해야 하는 때가 아니면 어떡하지?

이 사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지?

 

이렇듯 옳고 그름의 규범적 기준과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기준에 갇혀 있느라

정작 중요한 나의 마음과 몸에 대한 성찰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복잡한 생각들과 두려움으로

결국 어떤 시도도 못해보고 시들시들해져서,

결국엔 “사랑이란 게 뭐 그런 거지. 별 거 있겠어?” 라며

냉소적인 태도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그러한 냉소도 나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냉소는 또한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하늘의 대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스스로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할 능력이 결여된 것은 생각지 않고,

그저 나를 알아봐주지 못하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원망만이 가득하다.

결국 자신의 선택과 책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외부로 책임 전가시키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니 더 발전할 수도 없고, 상대가 바뀌어도 그 패턴은 동일하게 반복될 뿐이다.

 

이러한 나 같은 청년에게 고미숙은 말한다.

청년이여, 욕망하라!

그리고 대상을 창조하는 능력을 개발해라!

 

 

시절인연 타기: 바로‘지금-여기’를 살아내기

 고미숙씨가 여러 가지로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왜 연애를 잘 못하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을 했는데, 그 중 핵심은 ‘욕망’과 ‘환상’인 것 같다.

 

이것은 연애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따라서 나의 몸을 통해 드러난 욕망이 어떤 것인지,

그 욕망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충동인지 성찰하는 것과,

그 욕망을 어떻게 바꿔내고, 발전시켜 가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방해하는 큰 걸림돌은

바로 두려움을 포함한 여러 가지 환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환상들은 지금-여기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의 시절인연을 찾아가는 것을 심히 방해하게 된다.

과거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연민과 미련들,

미래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혹은 어처구니없는 이기적인 장밋빛 환상.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다

시절인연을 놓치고 말 가능성이 높다.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느라 정작 지금-여기를 보지 못하는 형국이다.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과거의 실패를 생각하며 끊임없는 자기연민과 미련에 휩싸여

제대로 된 오늘을 살지 못했던 날들.

미래의 이별과 아픔이 두려워 현재 마주하고 있는 시절인연을 멀리하며,

적당히 관계를 맺어가던 시간들.

그러면서도 이런 나를 받아주고 사랑해줄 운명 같은 누군가가 다가와주기를 기다리던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태도.

결국 자신이 선택한 결정 때문에 누구와도 연애다운 연애를 못해봤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스스로의 선택들을 포장하며 합리화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내가 얼마나 비주체적이고 나약하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나가며

지금까지 시절인연이라 느꼈던 관계 앞에서 망설이다가,

혹은 두려워하다가 그저 그렇게 지나온 세월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선택을 시작하였다.

자연스레 찾아온 시절인연을 선택하고, 대상을 창조해나가고자 마음먹은 것.

자기연민과 환상 속에서 벗어나 지금 나의 욕망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자 내 ‘몸’을 쓰며 노력하고 있다.

 

사랑이란 것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내 몸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적인 사건이기에

내 몸을 던지지 않고서야 어찌 사랑을 알 수 있겠는가?

고상한척 책상에 앉아 사랑은 이런 거야 정의내리기 바쁜 것이 아니라,

나의 몸으로 부딪쳐보며, 내 몸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며,

내 마음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통해,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힘은 어떠하며, 무엇을 창조하는지 배워가고 싶다.

 

머리가 아닌 내 온 몸으로!

 


살림의 경제학

저자
강수돌 지음
출판사
인물과사상사 | 2009-02-23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개인의 인격과 건강, 공동체, 생태계가 모두 존중되는 '살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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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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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공부/『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게르하르트 로핑크/ 2012.03.25]

 

 

새로운 삶, 우리부터 시작!

 

 

겸손

 

들어가며: 세상을 바꾸고 싶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이것이 내 꿈이었고, 내 고민이었다.

어떻게 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일인가?

어떠한 노력들이 필요한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공부했었고, 고민했었고, 실천하려 했다.

뭔가 세상의 큰 흐름을 바꿔보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을 바꾸는 것: 대조사회 만들기?

로핑크는 이 책에서 한결같이 대조사회를 만드는 것에 대해 강조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직접적인 접근방법이나, 대안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통해 대조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말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날카로운 공격이라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제자단, 초대교회, 고대교회를 관찰하고 분석하며,

대조사회를 이루고자 한 그들의 지향과 노력에 대해 설명하며

대조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산 위의 마을이 숨길 수 없듯이 예수를 추종하는 공동체 또한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다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대조사회를 이루는 것은 그 자체로 제자들이 해야 할 몫이고,

또한 가장 효과적인 선교수단이라 설명한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을 따라간다면 바로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다.

우리의 일차적 목표를 외적 성장이기 이전에 튼튼한 내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 공동체에 집중하면 된다.

 

그런데 이 불편한 마음은 뭘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다.

너무 교회라는 틀 안에 갇히는 것은 아닌지,

너무 우리 안에 매몰되는 것은 아닌지,

우리 또한 꽉 막힌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아니 정말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남들은 들어올 수 없는 성을 짓는 것은 아닌지,

고여서 썩는 물이 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세상을 바꿔가는 것과는 상관없는 집단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선택과 집중

위에서 나열한 불안함은 우리를 긴장시켜 깨어있게 할 수도 있으나,

때로는 이것도 저것도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게 하기도 한다.

 

왜 불안해할까?

나 스스로 공동체의 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완벽한 대안을 만들고 싶은 욕심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무는 것인가?

 

모든 것을 하고 싶은 욕망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것을 믿고 그것에 충실한 것이라 믿는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과연 지금 하고 있는 공동체에는 충실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과연 본이 될 만한, 누군가가 부러워할만한 공동체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지,

공동체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이다.

 

저자는 성경에서 강조하는 율법과 예수의 산상수훈을

급진적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며,

급진적인 성경의 요구를 부담스러워한 사람들이 애써 그 메시지를 희석시키고,

왜곡시켜왔다고 지적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선포하였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로 살아낼 것을 요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실제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함과 동시에,

제자들에게 그것을 증명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메시아가 오셨음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그것으로 인해 이제 만물이 새로워졌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메시아는 오셨고 세상은 과연 달라졌다.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사는 메시아 백성 안에서 달라졌다.……즉각 직감되려니와, 이 대답은 사실 극도로 위험한 대답이다. 교회의 현실이 어느 날엔가 이 대답의 거짓됨을 책망하게 되고 보면, 그리스도론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대답을 초기 교부들은 불사했다는 사실이 더욱 감동적인데 그들 자신에게도 이미 좀더 무난하고 좀 덜 위험한 해답이 될 만한 해석학적 원리는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290~291)

 

초기 교부들은 메시아가 오셨음을 내면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실제 우리 삶에 이미 도래했음을 인정하고,

선포하고, 증명해내려 분투했음이 분명하다.

 

세상을 바꿔나간다는 것은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인정하고, 믿고,

그 방식을 살아내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의 삶은 세상을 바꿔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와있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요청하신다.

 

“새로운 세상은 이미 도래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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