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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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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세 12주차/최종 에세이/2011.06.02]

 

 

자유로운 세상을 위하여

 

겸손

들어가며

 난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조용한 아이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정말 말을 잘 들었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들이 원하는 기준으로 나를 만들어가며 인정받고 싶었다. 난 정말 착한 아이였다. 이름대로 정말 겸손하고 순종적으로 살아갔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유롭고 싶다고! 영화「브레이브 하트」에서 멜 깁슨이 “Freedom!"하고 외치는 장면은 어린 나이였지만 정말 내 안에 무엇인가를 꿈틀대게 했다. 자유! 그것은 정말이지 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와 뜨겁게 물컹거리는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학교에는 잘 다녔다. 내 삶이 달라진 것은 없었고, 자유에 대한 그 갈망은 음악 할 때나 운동 할 때 가끔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는 다시 내 의식 아래로 숨어들어갔다. 도대체 무엇이 날 자유롭지 못하게 했던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자유롭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그것들은 무엇일까?

 

1. 자기계발 담론에 빠져버린 무능력한 소비주체들

 수업도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며, 0교시도 없고 야자도 없는 대학은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락해 줄 것만 같았지만, 오히려 따야할 자격증이 얼마나 많은지, 토익ㆍ토플은 몇 점 이상을 올려야 하는지, 학자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동을 해야만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기계발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리고 우리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자기계발 담론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리 어렵지 않은 질문이다. 그렇게 해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또 생기는 질문.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

 그건 바로 우리가 철저히 돈을 소비함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소비로써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고, 우리 삶의 필요 또한 소비로서 해결하는 ‘소비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모든 것이 제도화된 사회에 빼앗겨 버렸다. 이반 일리히의 글을 통해 나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성찰하게 된다. 학교나 학원에 가지 않고 스스로 배워가는 방식에 익숙지 않고, 아프면 내가 왜 아플까 성찰하기 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병원으로 달려가고, 스스로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돈을 주고 사먹는 것이 더 익숙한 나의 '몸'.

 이러한 소비적인 몸을 갖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수적이다. 정말이지 지금 사는 세상은 돈이면 다 해결된다. 모든 것은 제도화되어있고 전문화되어있다. 돈만주면 사소한 심부름에서부터 관혼상제까지 누군가가 대신 해 줄 수 있다. 정말 요람에서 무덤까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이런 뜻이 되기도 한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이미 무능력해져버린 우리는 무덤에서 요람까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린 이제부터 돈을 벌어야만 한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은 그러한 우리에게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자기계발하라고 속삭인다. 이미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부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들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속이기 쉬운 먹잇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계발 담론 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리고 이렇게 경쟁하며 경쟁의 결과로 얻은 부를 축적하고 소비하는 삶이 원래 우리의 삶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2. 우린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왔지?

 그러나 마르셀 모스와 나카자와 신이치의 글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개인과 개인이 경쟁하며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삶의 방식은 본래 우리 삶의 방식이거나 숙명적인 삶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병권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도 우리가 진보의 결과라 믿고 있던 화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금의 경제 시스템이 결코 자연스러운 진보의 결과가 아니라 과거와의 단절로부터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세 사람의 글들은 단절되어버린 과거 사회의 모습은 어땠는지 살펴보게 해주었다. 물론 그 사회 또한 이상적인 유토피아는 아니었겠지만 그 모습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능은 무엇인지 성찰하게 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망은 존재하지만 그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고 어떤 배치에 놓이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모양은 분명히 달라질 수 있다. 증여의 방식으로, 혹은 소유물을 파괴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했던 전통은 한 사회가 부와 부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관리하였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부를 서로에게 증여함으로써 관계를 유지해 나갔고 부를 순환시켰다. 부의 순환은 권력의 분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교환과 소비를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과는 다른 방식이 우리 이전에 존재했었고, 지금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이러한 본능을 자극하는 방식의 삶, 그 본능을 살려내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3.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지금 우리 삶의 방식이 진보의 결과이거나 필연적 결과가 아니고, 오히려 근대를 지나오며 여러 가지 이유를 통해 만들어진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 그러한 시스템을 따르며 살 필요가 없어졌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가길 원한다면 개인을 공동체와 분리시키고 국가와 제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능력하게 만든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린 당차게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고민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만은 않는다. 방향을 틀었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좀 더 풀면 어떻게 먹고, 입고, 놀고, 일하고, 살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유지해나갈 것인가 하는 과제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이러한 삶의 과제들을 모두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것으로 배워왔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기원을 더듬어 가보며 사적소유란 것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함께 일하고, 함께 공동으로 부를 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증여하고 교환하는 방식으로 살아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살려내야 할 것은 공동체적 생활 방식이다.

 고미숙 선생님은「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에서 돈을 쓰는 용법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어쨌든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완전히 소비를 하지 않는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돈을 쓰는 용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돈의 용법을 바꾸지 않고 자본주의가 어떠니, 물신주의가 어떠니 하고 떠들어봤자 정작 우리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돈의 용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생활의 배치를 변화시키고, 관계의 배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돈을 쓰는 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우리가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사소하게는 먹는데 들어가는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기 위해 도시락을 싸서 다니려고 해도 최소한 아침 기상 시간을 바꿔야 하고 요리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기념일에 물건을 소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선물을 하려면 최소한 몸을 더 써야 하는 건 피할 수 없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큰 결단까지 구체적인 우리 생활의 배치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생활의 배치를 만들어가다 보면 이것을 결코 혼자서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교환이 아닌 증여의 방식을 선택하려 해도 증여와 답례를 함께 할 관계가 없을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 순수증여를 하는 땅도 우리가 그 땅을 착취하려고만 할 때 우리에게 화를 내는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가 답례 없는 증여를 계속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서로에게 증여하며 부를 공유하고, 함께 먹고, 나누고, 일하고, 놀 수 있는 관계의 배치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가 공부한 것들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적 구조, 공동체적 관계인 것이다.

 

4. 우리가 믿어야 할 것

 이런 공동체에 대한 희망찬 마음을 품더라도 어디선가 늘 들려오는 소리는 있다. “공동체적 관계? 그런 구조? 이게 돼?” 라는 반응들. 우리 안에는 이미 인간은 끝없이 이기적인 존재이며 그 이기적인 것들을 물리적인 힘을 가해 통제하지 않으면 결국 세상은 망해버릴 것이란 확신이 있다. 증여적인 삶의 방식이 좋긴 하지만 인간이란 게 이기적이어서 어느 순간 확 딴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란 불안함이 있다. 세상에 믿을 놈은 나 하나밖에 없고, 그래서 불안하지만 내 인생 내가 책임지고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믿을 때 보다, 혼자 책임져야 할 사회적 리스크를 감당할 때 더 마음이 놓인다는 심리적 상태를 반증하는 이런 현실은 매우 아이러니 하지만 매우 보편적인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정말 사람은 그런 것일까? 우린 우리들을 믿을 수 없는 것일까? 크로포트킨은 철저히 민중의 힘을 믿었다. 국가가 간섭하지 않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모든 소유를 공유하여 의식주를 함께 해결하고, 개인 간의 자유로운 결사체를 조직할 수 있게 허용할 때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와 상호부조가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는 민중을 ‘오해된 위대한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만인은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은 서로 돕는다’고 믿었다. 인류의 진보는 약육강식의 경쟁이 아닌 상호부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역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사회가 어떻게 뒤틀리고 수많은 모순들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보게 된다. 자신들의 공동체를 이루며 지켜내고 있던 부족들은 제국에 의해 침략당하고, 부에 대한 욕망과 과학의 발전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그렇게 생산된 부를 소비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경제력을 활용해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음을 기록하는 역사.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제국의 침략 이전에 있던 원시부족의 삶은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그것 또한 인류의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닌가? 개인에게 권력과 부가 독점되는 것을 막는 시스템을 스스로 만들어 살았던 부족의 모습, 자본과 권력의 힘 앞에서도 대항하던 수많은 저항과 혁명들, 3개월간 지속되었던 파리코뮌, 5.18광주의 광주공동체, 그리고 곳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공동체들. 이것 또한 우리의 역사이다.

 그런데 함께 공부를 하며 서로 이런 질문들이 늘 오고가게 되었다. “공동체를 이루며 살든, 증여를 하든, 인간이 잘 살기 위한 이기심 때문이고, 그렇다면 인간은 결국 이기적인 존재가 아닌가?” 스스로도 이 질문에 대해서는 뭐라 대답하기 어렵다. 인간이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 그걸 묻다보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는 분명하다.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이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런 인간들이 살고 있고 만들어 가고 있는 ‘사회적 상태’이다.

 클라스트르는 원시 부족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들이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이 추장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독점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절대 이기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다. 추장의 권력을 통제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과 장치들을 보면 인간의 욕망은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통제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제도와 법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문화와 힘으로 개인의 욕망을 조절하고 그것으로 인해 평화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본능이고 방식이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의 힘이다. 제도와 강제력, 경쟁적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감각들을 살려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제도와 경제적 시스템 안에 빼앗겨 버린 우리들의 자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공동체를 통해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스스로,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나가며:‘가능성’이 아닌‘가치’를 향하여

 지금까지의 공부를 하면서 중간 중간 나를 괴롭혔던 고민들은 이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세상이 정말 바뀔까? 이 말들이 나에게는 와 닿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 고민들을 해가며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뀐다고 해서 정말 나도 바뀔까? 나도 정말 자유로워질까?” 역사 속에는 수많은 사건들도 있었고, 수많은 혁명들도 있었다. 그만큼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바뀌어왔다. 그러면서 생각해본다. 그러한 변화 속에 존재한 개인과 공동체는 과연 그 변화만큼 자신의 삶 속에서 변화를 느꼈는지를 말이다.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민중의 삶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혹은 우리나라에서 민주화가 성공하여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 민중의 삶을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세상이 바뀔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 한편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이 바뀐다고 해도 내가 바뀌지 않으면 내가 살고 있는 그 세상은 바뀐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실존적으로 겪지 못한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그저 TV속 뉴스처럼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이집트가 민주화 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말 큰 변화인데, 그것이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그들이 경험하는 크기와 정비례하지는 않는다. 나의 삶을 바꾸지 않은 채 이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없을까 고민하는 것은 공허한 주정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이 고민들은 맨 처음 내가 왜 자유롭지 못할까, 자유롭고 싶다고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결국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까? 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언젠가 또 다시 내 발목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회운동가들이 결국 자신들이 비난했던 자본주의에 흡수되고, 오히려 더 악질적인 자본주의적 주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결국 그들 스스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정직하게 우리 스스로에게 돌아와야 한다.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역사는 가능성에 의해서 쓰이지 않는다. 역사란 것이 누군가 가능성 있는 것을 제시하고, 그것을 향해 그대로 달려 나간 적은 없다. 수많은 우연과 사건들, 사람들, 시도들에 의해 얽히고 설 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예상해볼 수는 있지만 그 예상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모른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누구의 예상이 들어맞았는지, 누구의 통찰이 옳았는지 평가할 뿐 당시 역사의 주체들은 사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혁명의 모습이 꼭 그들의 바람과 맞지는 않았다. 결국 가능성을 보며 선택할 때 그 가능성이 우리의 예상에 맞게 돌아오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묻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가치가 아닐까? 정말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인지, 그것이 우릴 자유롭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했다면 그렇게 살기 위해 생활의 배치와 관계의 배치들을 바꿔나가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고 서로 더불어 함께.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자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도움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자신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가능성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밀고 나가는 삶을 살아가기로 뭉친다면 그들의 논리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 것이다.

 엥겔스는 수많은 핍박에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세력이 확장되는 그리스도인을 보며 혁명의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혁명은 ‘전염’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가치를 믿으며, 그렇게 살고자 가능성과 상관없이 살아갈 때 그것은 전염되며, 결국에는 국가에 대항할 힘이 된다. 자유는 아무렇게나 얻어지지 않는다.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철저히 성찰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움직이는 자에게 주어질 뿐이다. 자유에 무임승차는 없다. 이제 그러한 삶을 만들어 가보자. 공부하는 세력이 되기 위해 모인 우리들. 이제부터는 어떤 세력을 만들어가며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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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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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세 11주차/『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피에르 클라스트르/ 2011.05.26]

 

 

다시 만들어야 할 우리의 시작

 

겸손

 구약성경 이런 내용이 있다. 이집트의 노예로 살다가 모세에 의해 그곳에서 탈출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가나안 땅에 정착하며 그곳에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국가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 안에는 각 지파가 있고, 그 지파들 간의 연합을 통해 사회는 구성되고 유지된다. 왕은 존재하지 않고, ‘사사’라는 직분의 사람이 지파 내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재판을 하거나, 다른 민족의 침입이 있을 시 사람들을 모아 전쟁을 이끈다. 그러나 그 사사의 직분도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필요가 없을 때에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이 섬기는 신인 야훼에게 요구한다. 왕을 달라고. 이스라엘의 주위는 대부분 전제국가가 존재하고 그들에게 늘 위협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훼의 선지자인 사무엘은 경고한다. 너희가 요구하는 그 왕이 결국 너희에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너희의 자녀를 자신의 병사로 데려갈 것이고, 너희를 강제 노력으로 힘들게 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요구했고, 결국 왕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사무엘의 경고대로 백성들은 고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물론 다윗 같은 왕은 높이 평가받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그렇지 못했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는 정치권력이 어디로부터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수수께끼라고 말한다(p,253). 그러나 위의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이 책에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면, 국가의 출현이 결코 경제적 필요, 혹은 사회적 진보로 인한 필연적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권력의 독점으로 인해 발생되는 착취와 폭력, 소외가 발생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도 어느 정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중요 개념 중 삼권분립이나 여당-야당 체제는 절대 권력을 막기 위한, 권력을 분배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가. 결국 우리도 알고 있다. 국가는 권력을 독점하려 하고, 그것을 막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힘들어진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거기까지이다. 어찌됐건 우리는 그러한 국가에 우리의 주권을 양도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애처롭게 기다리고 있다. 제발 훌륭한 정치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그러나 그 기대가 수없이 많이 좌절되어버린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치에 대한 회의와 냉소뿐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회들은 자신의 정치영역을 어떤 직관에 따라 구성했고, 그 직관은 사회에서 규칙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즉 권력은 본질적으로 강제력이고, 정치 기능의 통일을 향한 활동은 사회구조라는 기초 위에서 그리고 사회구조에 합치하도록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고 사회에 적대적인 피안으로부터 사회에 대항하여 행사되며, 권력은 본질적으로 자연의 은밀한 드러남일 뿐이라는 것이다. …(중략)… 그들은 권력의 초월성이 집단에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외재적이고 스스로 정당성을 창출하는 권위라는 원리가 문화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그들은 스스로 정치적 권위의 설립자가 되었고, 권력이 출현하면 그 즉시 억제하는 부정성을 견지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피에르 클라스트르,『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p.58)

 

 저자가 말한 대로 원시부족들은 권력이 어떠한 결과를 만드는지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추장이 가진 권력은 추장에게 있어서 힘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이었다. 그들은 여러 방식을 통해 그들 스스로 권력을 통제하는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를 상상하고 있는가?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지만, 군사정권 때와 비견될 정도로 국가가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지금과는 다른 정당이 정권을 잡고, 훌륭한 지도자가 선출되어 우리의 목소리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은가? 정말 그것이 총을 들어 도청을 지키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며, 최루탄 속에서 눈물과 침을 흘리며 쟁취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모습인 것인가?

 좀 더 다른 사회를 상상해 본다. 원시사회에서 추장을 압박할 수 있는 것은 그 부족민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가를 압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흔히 시민운동, 주민조직화를 말하는 그룹에서도 이제야 말하는 것은 공동체가 대안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들이 얼마나 연대하느냐에 따라 권력분배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담론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공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공동체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삶을 그리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순히 공동체를 자신들의 꿈꾸는 바를 이루기 위한 방법론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게 된다.

 과연 공동체가 그런 것인가. 그러한 방식이 얼마나 공동체의 힘을 발휘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원시부족 사회에서의 공동체는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집단이기 이전에, 의식화된 집단이기 이전에 함께 먹고, 자고, 놀고, 일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논리와 방법론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양식이었고 직감이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삶을 공동체적 삶의 방식으로 재배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공동체적 본능을 살려낼 것인가. 바로 그 지점이 국가와 그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시작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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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세 10주차/『빵의 쟁취』-크로포트킨/ 2011.05.19]

 

 

민중, 그 오해된 위대한 존재

 

겸손

 90년대 초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물론 그 때 나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커 가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말을 듣고 자라왔다. 우리 윗세대처럼 학교에서 반공웅변대회를 하거나, 반공표어ㆍ포스터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래저래 안 좋은 소리는 충분히 들은 것 같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이상은 참 좋아. 그렇지만 너무 이상적이어서 문제야.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이고 게을러지고 싶어 하거든. 그러니까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면 망하는 거야. 일을 하든지 안하든지 똑같이 받는 데 누가 열심히 일하겠어?” 그러면서 내 안에도 똑같은 말이 각인됐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라고. 그래서 적당히 경쟁해야 하고, 경쟁의 결과에 따라 성과별로 대가를 줘야 하고, 통제되지 않는 시민을 다스릴 강제력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전제가 불편해졌다. 정말 인간은 모두 그런 걸까? 사회주의국가의 몰락이 정말 민중들이 이기적이고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해진 것일까? 오히려 민중의 노력을 착취하고 독점한국가의 책임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힘은 충분히 강대하며 혁명이 일어나면 무정부 공산주의의 사상이 자리를 굳히게 될 것임을 우리는 모든 면에서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우발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 것은 민중이며(무정부), 공산주의자의 수는 다른 모든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짐에 따라서 증가할 것이다. …(중략)… 다만 민중이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하라. 그러면 10일 이내에 식량의 공급이 훌륭하고 정연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민중을 본 일이 없는 자들이나 평생을 책에 파묻혀 보낸 자들만이 그것을 의심할 것이다. ‘오해된 위대한 존재’ 즉 민중의 조직적 정신에 대해서는, 파리에 바리케이드가 나날이 늘어날 때, 또는 50만 명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던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러면 그들은 민중이 벼슬아치 근성의 관료적 무능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가를 말해줄 것이다.

(크로포트킨,『빵의 쟁취』, p.57~58)

 

 크로포트킨은 민중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 역사의 모든 진보는 그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노동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훌륭한 발명가가 획기적인 발명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그 사람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 사람 이전의 축적된 기술들이 있었고, 그 기술들을 가능하게 한 노동이 분명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아이폰으로 한창 잘 나가고 있는 애플사의 기술이 과연 그들이 처음부터 만든 것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있기 전에 수많은 기술들이 이미 발명되어 있었고, 그 기술들을 활용해 노동한 노동자들이 있었고, 그 노동자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가족을 비롯한 수많은 인적ㆍ물적 관계가 얽혀있다. 이렇게 만인은,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그렇기에 모든 생산물은 모두의 것이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은 모든 생산물을 공유할 것과 그것을 관리할 권한을 민중 스스로 갖게 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그가 말한 혁명이다.

 크로포트킨은 이러한 혁명이 부분적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부분적인 혁명은 그 한계성이 크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에는 조금 거리가 생긴다. 과연 전체적인 혁명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런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우리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크로포트킨은 의식주, 노동, 사치, 농업 등 구체적인 혁명의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분명 우리의 삶 가운데 살려 쓸 부분이 많음을 보게 된다. 소유의 전면적 공유는 아니라 할지라도 마을 안에서 함께 나누며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많다. 적어도 사회적 리스크를 분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는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된 국가가 아니라 혁명적 공동체가 아닐까. 그런 마을이 아닐까.

 이런 상황 속에 필요한 것은 민중의 힘에 대한 신뢰이다. 민중은 그의 말대로 ‘오해된 위대한 존재’ 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 민중의 힘에 대해 믿지 못하는 경향이 많이 보인다. 사회복지사는 클라이언트의 힘을 보지 못하기에 서비스를 제공하려 하기만 한다. 그들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관심이 민중에게서 떠나있음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 않는가? 생산적 복지를 표방하며 노동을 하는 조건으로 수급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근로연계복지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민중은 스스로 일하고자 하는 마음과 노력이 부족하니 조건을 거는 것이다. 노동을 하면 필요한 것을 주겠다고. 과연 그들이 노동에 대한,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걸까? 일해서 돈을 벌어 자립하려 하면 더 살기가 힘들어지는 조건을 만들어놓고선 일하라고 하는 그들의 논리는 정말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

 민중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동자동 사랑방을 방문했다. 쪽방촌에 살면서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강력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국가의 도움 없이, 아니 국가의 도움과 간섭이 없기에 꿋꿋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해가는 그들의 모습 속에 크로포트킨이 본 것이 이러한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하루에 열 번을 싸우지만 열 번을 화해하며 깊어지는 그 우정. 필요할 때마다 서로의 돈을 빌려서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극복하는 힘. 내가 잘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 다른 이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몸으로 알고 있었고, 실천하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살 수 있다. 우리 안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 서로 도우며, 나누며, 일상을 공유하고, 함께 살 수 있는 힘 말이다. 나는 그 힘들을 자극하고 싶다. 사회복지현장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있는 그 힘을 자극하고, 느끼게 하고, 그 힘을 활용하며 살아갈 때 더욱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 우리 안에 그런 큰 힘이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봐야 뭣하겠는가? 스스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관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또한 크로포트킨처럼 민중의 힘을 믿는다. 우리 안에 무엇보다 강력한 힘이 있음을 본다. 이제 그 힘을 드러낼 때이다.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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